“라면 먹고 갈래?”


한국인의 식생활에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라면입니다. 세계라면협회에 따르면 한국인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연평균 73개, 세계 1위라고 합니다. 2위 베트남이 55개이니 한국인의 라면 사랑은 참 각별합니다.


한국 최초의 라면은 1963년 출시된 삼양라면으로 54년째 팔리는 대표적인 장수 상품입니다. 가로 20cm, 세로 20cm, 무게 120g. 강렬한 주황색 바탕이 참 친숙합니다.


삼양라면의 디자인 변천사 ⓒ삼양식품

 


10원으로 

굶주림을 달래다


삼양라면의 탄생은 6.25 전쟁 후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렸던 척박한 경제환경 속에 이뤄졌습니다. 


삼양식품 창업자 고(故) 전중윤 명예회장은 남대문시장에서 미군 부대가 남긴 잔반을 끓여 만든 꿀꿀이죽을 먹으려고 장사진을 친 노동자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1963년의 삼양라면 ⓒ삼양식품

식량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를 고민하던 중 1950년대 일본에서 경영 연수를 받을 때 맛봤던 라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일본 묘조(明星)식품을 찾아간 끝에 기계와 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의 라면을 내놓게 됩니다. 출시 당시 한 봉지 가격은 10원. 꿀꿀이죽 한 그릇이 5원임을 고려해 최대한 저렴하게 매겼습니다.


 

삼양라면의

전성기


오랜 기간 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하루아침에 라면을 알리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라면을 실이나 플라스틱 등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삼양식품 모든 직원과 가족들이 극장이나 공원을 돌며 시식 행사를 열고, 거리 곳곳을 누비며 라면 홍보에 나섰습니다. 


과거 삼양라면 광고 ⓒ삼양식품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식량 위기 해결을 위해 혼분식 장려 정책을 펼치면서 삼양라면은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합니다. 


1960년대 삼양식품의 매출 증가율은 최저 36%, 최고 254%에 달했습니다.


1968년 삼양라면 360만 봉지를 베트남에 수출하는 계약을 맺는 장면
ⓒ국가기록원

 


후발주자의

등장과 역전


라면이 인기를 끌자 여러 업체가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원조’ 삼양식품의 아성은 강력했습니다. 1969년 라면시장 점유율이 83.3%에 달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후발주자는 농심이었습니다. 농심의 추격 전략은 물량 공세였습니다. ‘롯데라면’ ‘소고기라면’ ‘짜장면’ ‘농심라면’ 등 갖가지 신제품을 쏟아내면서 1970년대 점유율을 30%대로 올라서는 등 만만찮은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1980년대에는 오뚜기, 한국야쿠르트 등이 라면시장에 진출하면서 지금의 상위 4개 팀의 경쟁 구도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9년,  라면시장을 뒤흔든 초대형 사건 우지 파동이 터집니다. 당시 검찰은 삼양식품이 라면 제조에 공업용 우지를 썼다며 주요 임직원을 줄줄이 구속했습니다.


국민 식품에 공업용 원료를 썼다는 발표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삼양식품의 도봉동 공장은 가동을 중단했고, 1000명 이상의 직원이 회사를 떠났으며, 60%에 달하던 시장점유율은 15%로 떨어졌습니다.

 

소녀시대가 등장했던 과거 삼양라면 광고 ⓒ삼양식품

 


‘우지 파동’

삼양라면은 억울하다


하지만 삼양식품은 “합법적으로 수입한 식용 유지” 라며 검찰의 발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끈질긴 법정 공방을 벌인 끝에 7년 9개월 만인 1995년 7월, 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미 삼양라면의 상표 가치는 회복이 어려울 만큼 떨어진 후였습니다. 농심에 점유율 1위도 내어줘야 했습니다. 이때 바뀐 라면시장의 1위 자리는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죄판결을 거둔 승리의 기쁨보다 회사가 그동안 겪었던 인고의 시간과 수천억 원의 손해를 감수하는 비애가 너무나 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