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중심지, '뉴욕'과 '월가'의 기원

2019-02-18 23:52
경제 이야기
written by 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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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월가는 

어떻게 경제 중심지가 되었을까?


뉴욕의 월가(Wall Street)

세계 최대 금융 중심지이자

자본주의 경제의 총아라고 할 수 있죠.


지금 이 순간에도

월가 11번지에 위치한

뉴욕 증권거래소에서는,


무려 21조 달러(약 2.2경 원)에 달하는

기업들의 주식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2017년 6월 기준)


그런데 뉴욕의 월가는 어떻게

금융과 자본의 중심지가 된 걸까요?





대항해시대, 

네덜란드가 발견한 맨해튼


월가가 위치한 곳은

뉴욕주의 맨해튼 섬입니다.


500년 전 맨해튼 섬에는

원주민들이 강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옥수수와 강낭콩을 경작하고 숲에서 

노루와 곰을 사냥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524년, 이탈리아의 항해사

조반니 다 베라차노(Giovanni Da 

Verrazzano)가 처음 맨해튼 섬을 발견했죠.


이후 1609년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이 

맨해튼 섬을 탐험했고

자신의 이름을 따 맨해튼 섬을 둘러싼 강을 

'허드슨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맨해튼 섬을 처음 발견한 조반니 다 베라차노 ⓒ위키피디아)


맨해튼을 본격적으로 키운 것은

대항해시대의 주역, 네덜란드였습니다.


1621년 네덜란드

아메리카 및 아프리카와의

무역을 목적으로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였고,


1624년 허드슨강 입구에

본격적인 무역 거점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 총독

페터 미노이트(Peter Minuit)

원주민으로부터 맨해튼 섬을

단돈 24달러에 매입하고,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 

이름을 붙입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뉴 암스테르담 ⓒ위키피디아)



'월가'와 '뉴욕'의 유래


새로운 식민지 무역의 거점

뉴 암스테르담을 점령한 이후,


네덜란드인들은 식민지 지역과

주거 지역을 나누기 위해

벽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wall)의 시초였죠.


당시 영국은 아메리카에 진출하기 위해

뉴 암스테르담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1652년 영국의 정치가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은,


네덜란드의 해양 무역으로부터

영국 산업을 보호할 목적으로

항해 조례를 선포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 ⓒ위키피디아)


이 조례를 시행한 이후로

네덜란드의 무역 수익이 크게 줄면서

두 국가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결국

네덜란드영국전쟁을 치릅니다.


이때, 뉴 암스테르담에 세워진 벽은

세월을 거쳐 더 강력해졌고

영국인들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막으로 쓰이기도 했죠.


이렇게 원주민,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벽(wall)

월가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제임스 2세 ⓒ위키피디아)


참고로 뉴욕이라는 도시의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아시나요?


맨해튼을 처음 발견한 것은

네덜란드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뉴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미국 전역은 영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1660년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찰스 2세(Charles Ⅱ)는 항해법을 제정해

뉴 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차기 왕으로 즉위한 제임스 2세

(James Ⅱ)에게 그 땅을 주는데,


당시 그가 요크 공(Duke of York)이라는 

작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뉴욕(New York)'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경제 발전의 근간이 된 사건 3가지


뉴욕과 월가가 세계 금융 중심지로

성장하기까지 많은 사건 있었지만,


아래의 3가지 사건은 그중에서도

지금의 뉴욕을 있게 한 중요한 

변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최초의 은행 

미합중국 은행 설립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1783년 11월, 13개 주에서 

독립을 얻게 됩니다.


독립 후 미국 정부의 골격을 갖추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 중 하나는 바로

미국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이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 ⓒ위키피디아)


그는 신생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의 근간을 잘 다져야 하며

특히 상업과 공업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상공업이 발전하기 위해

통일되고 안정된 경제 체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그는 곧

국립은행의 설립을 건의합니다.


그리하여 1791년 2월 

미국 최초의 국립은행

미합중국 제1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이 탄생했습니다.


이 은행의 위치는 지금의 뉴욕보다

조금 아래 위치한 필라델피아였으나

동부권 경제 금융 발전의 시초가 되었죠.


이후 합헌성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으로

20년이 지난 후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최초의 중앙은행이란 의의를 지닙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 미합중국 제1 은행 ⓒEncyclopedia of Philadelphia)



2) 최초의 증권거래소

뉴욕 증권거래소 설립


18세기 미국은 증권업, 금융, 경제에

앞서가는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럽의 네덜란드와 영국

경제, 금융의 중심 국가였죠.


미국은 네덜란드나 영국처럼

증권거래소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증권 거래의 형식이나 수수료 등이 

표준화되지 않아서

주식 투자자들은 불편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1792년,

미국 주식 브로커 24명이 월가에 모여

주식 매매 수수료를 0.25% 이하로

받지 않겠다는 내용의 '버튼 우드 협정'

(Button wood agreement)을 맺습니다. 


월가의 무화과나무(Button wood)

아래서 이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버튼 우드라는 이름이 붙었는데요,


이 협정을 기반으로

1817년 뉴욕 증권 거래위원회라는 

기관이 출범하였고,

 

1863년 지금의 '뉴욕 증권거래소'

(New York Stock Exchage)

정식 승인을 받게 됩니다.



(버튼 우드 협정을 묘사한 그림. The 1792 restaurant에 걸려 있다. ⓒNYSE)


 

3) 교통혁명의 시작

이리 운하 건설


19세기 초 뉴욕 6대 주지사였던 

드윗 클린튼(Dewitt Clinton)

미국 북부의 이리호(Lake Erie)와 

맨해튼의 허드슨강을 잇는

운하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은 

이를 두고 미친 짓이라고 말했고

드윗의 자금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드윗은 월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뉴욕주 채권을 발행하여 8년 만에 

이리 운하(Erie Canal) 완성하게 됩니다.



(드윗 클린턴 ⓒ위키피디아)


1825년

이리 운하가 최종적으로 완공되면서

서부와 동부의 교통 여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이리 운하가 연결되기 전에는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려면 

남부의 뉴올리언스를 거쳐야 했는데,


이리 운하를 통해 이동함에 따라

뉴욕에서 버팔로 사이의 

화물 수송비가 10분의 1로 크게 줄고

시간도 20일에서 6일로 줄었습니다.


이로써 대서양 연안의 뉴욕항은 

교통의 요충지로 떠오르게 되고,


이리 운하의 성공에 힘입어

또 다른 운하와 철도가 건설되는 등

미국의 교통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서부로 가던 물자들이

교통이 편리한 동부로 집중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뉴욕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이리 운하 ⓒ위키피디아)



자본주의의 정점에 선

뉴욕, 그리고 월가


400여 년 전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의 터전이었던 지역이,


네덜란드와 영국의 손을 거쳐

미국과 세계 자본시장의

중심지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뉴욕의 월가도

시작은 빈 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400년의 역사가 일궈낸 발전이

새삼 엄청나다고 느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뉴욕의 월가,

앞으로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요?


편집: 박은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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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박지은

국제경제에 관심많은 경제학도

박지은

에디터 : 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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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은